레프 야신
포지션:GK
국적:러시아
신장:189cm
생년월일:1929년 10월 22일
주요 클럽:FC 디나모 모스크바
클럽 커리어
소비에트 톱 리그 우승 5회
소비에트컵 우승 3회
국대 커리어
1954년 ~ 1970년
A매치 74경기
1956 올림픽 금메달
1960 UEFA 유로 우승
1964 UEFA 유로 우승
1966 FIFA 월드컵 4강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초월적인 반응속도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동체시력으로 들어가는 골도 막아내던 레프 야신은 현역 시절 커리어 절반 이상의 경기를 클린시트로 막아냈으며 1000회의 1대1 상황 중 50여골만을 실점, 페널티킥 선방률 역시 50%를 넘겼다고 전해지며 골키퍼들이 가장 막기 힘든 골대의 구석의 사각지대도 기가막히게 막아내 '야신 존'이라는 용어까지 탄생시킬 정도였습니다.
FC 디나모 모스크바에서만 뛰었던 야신은 5번의 리그와 3번의 컵 우승, 리그 베스트 11 14회 선정, 특히 1963년에는 리그 27경기에서 6골만을 허용해 전인미답의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더해서 소련 축구의 최전성기였던 60년대의 골문을 지키며 유로 1960의 초대 우승, 유로 64의 준우승을 최우수 키퍼로서 쟁취했고 4번의 월드컵에 참가해서도 1966년 대회에서 4강까지 오른 바 있습니다. 이제는 골키퍼라는 포지션의 대명사가 되버린 그의 이름을 따서 월드컵 최우수 골키퍼와 한해 최고의 키퍼에게는 '야신상'을 수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축구는 팀 스포츠입니다. 테니스, F1, 격투기같은 개인 스포츠라면 그 한해의 세계 대회를 우승하는 선수가 당연히 최고로 여겨지겠지만 축구는 아니죠. 당장 작년 2021/22 시즌 챔스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의 페를랑 멘디가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이냐고 물어본다면 모두가 고개를 저을겁니다. 역대의 평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신보다 뛰어난 커리어를 가진 골키퍼는 많습니다. 마누엘 노이어, 이케르 카시야스, 잔루이지 부폰, 디노 조프 등등 여러 후배 골키퍼들이 그보다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그 누구도 그의 아성을 넘었다고 평가받는 선수는 없습니다.
허나 워낙 과거 선수이다 보니 대부분의 팬들은 그의 활약을 흑백 필름으로, 그것도 짧게나마 밖에 못본터에 인터넷에는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안되고, 뻥튀기 되어진 낭설이 진실처럼 떠도는 경우가 잦습니다. 오늘은 그런 오해와 진실들을 바로 짚어보면서 왜 이토록 야신이 위대한 골키퍼로 추앙받는지 제대로 된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야신이 뛰던 시절에는 오프사이드가 없었다??
굳이 야신이 아니더라도 과거 선수들에 대해서 가장 잘못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가 과거에는 오프사이드가 없었다는 말인데, 오프사이드라는 규칙은 그 내용은 다르지만 이미 비슷한 형태로 야신이 뛰기 거의 100년전인 1863년, 영국에 축구협회가 설립될 때부터 있었던 룰입니다. '해당 공격수가 온사이드 위치에 있기 위해 해당 공격수와 상대 골라인 사이에 두어야 하는 상대 선수 최소 인원은 2명이여야 한다'라는 우리가 아는 인원수에 대한 오프사이드의 규칙은 이미 1925년, 그니까 야신 시대 이전부터 우리가 아는 형태로 옾사이드가 존재했다는 이야기죠.
선수가 겹치면 무조건 반칙으로 처리했던 '동일선에 관한 룰'이 만들어진 것도 1990년이었기에, 야신이 뛰던 때에는 오프사이드가 없어서 골키퍼 입장에서는 불리했다는 말은 잘못되었으며 오히려 현대에 비해서 유리했던 시기입니다. 만약 저시기의 골키퍼들이 현대에 비해 더 힘들었다는 주장이라면 수비적인 전술 체계의 발전이 덜 되었던 시점이라는걸 이야기하는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2. 야신의 풀경기는 남아있지 않다??
축구 역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가장 답답한 이야기입니다. 1955/56 시즌의 첫 챔피언스 리그를 기점으로 유럽 리그나 셰계 메이저 대회의 중요 경기는 대부분 흑백으로라도 풀경기가 존재합니다. 유튜브 뿐만 아니라 과거 영상만 올리는 사이트들도 상당수 존재하며 야신의 경우 소련이라는 변방 리그에서 뛰어서 클럽 커리어는 풀경기를 찾기 힘들지만 국가대표팀 경기만 해도 10회가 넘는 영상이 존재합니다.
이마저도 소실된 영상의 복원 작업과 잃어버린 테이프 등을 찾으려는 노력들 덕분에 계속해서 과거 선수들의 경기가 새로 생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1980년대부터는 사실상 웬만한 리그와 대회의 모든 경기가 인터넷에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물론 뒤늦게라도 풀경기를 봤다해도 과거 레전드들의 경기를 라이브로 보지 않았다면 그 시대의 선수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라는 이야기들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선수 평가에 있어서 위상이나 시대 영향력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기에 그 때를 살았어야지만 더 잘알 수 있고 심지어는 그 시대를 살았어야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도 있을겁니다. 그러나 이런 논지만으로 모든 선수들의 평가하기에는 과거의 선구자들이 개척한 뚜렷한 길 위를 아직도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할 부분입니다.
3. 야신이 뛰던 당시 소련 국가대표팀은 약체였다??
1956년 하계 올림픽 금메달
1958년 월드컵 8강
1960년 유로 우승
1962년 월드컵 8강
1964년 유로 준우승
1966년 월드컵 4강
위 기록은 야신이 소련 국가대표로 13년간 뛰며 거둔 성적입니다. 그냥 딱 봐도 알겠지만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을 넘어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최고 수준의 팀이었습니다. 이고르 네토, 발렌틴 이바노프, 알베르트 셰스테르뇨프, 발레리 보로닌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은 아니지만 포지션별 최고 순위를 정한 글들을 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월드클래스로 분류 되었던 선수들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야신에 앞서 수비라인을 지켰던 셰스테르뇨프라는 선수의 경우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의 센터백으로 평가받는 선수였기에 수비가 크게 약하거나 한 팀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레프 야신이 가장 뛰어났겠지만 골키퍼란 포지션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당시 소련 대표팀이 거둔 호성적이 야신 혼자만 특출나게 뛰어나서 이룬 성적이 아니라는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4. 야신이 받은 발롱도르는 합당한가
1963년, 레프 야신은 소비에트 리그에서 27경기 6실점, 22 클린시트라는 괴물 같은 실점률을 기록하며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발롱도르를 수상했습니다. 허나 이 자국 리그에서의 대활약만이 온전히 발롱도르 투표에 영향을 끼친게 아니라는 시선 또한 존재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은 야신이 발롱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를 1963년 런던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세계 올스타의 친선 경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바비 찰튼, 바비 무어, 지미 그리브스 등의 선수들이 포진해있었고 반대편 나머지 세계 올스타팀에는 디 스테파노, 에우제비우, 푸스카스, 레프 야신 등이 있었습니다. 경기 내용은 잉글랜드의 2대1 승리였지만 레프 야신은 전반전 45분만 뛰고 교체되었음에도 10번의 선방을 기록하며 무실점으로 전반을 마쳤으며, 잘한다 잘한다하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이런 뛰어난 활약상을 그것도 최고의 선수들이 한데 모인 경기에서 해내는 것을 본 팬들과 전문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고 이것이 그가 발롱도르를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미디어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이런 친선경기가 잦았고 지금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던 당시에 이목을 끌 수 있는 빅매치에서의 활약 여부는 축구판의 여론을 크게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상당히 컸습니다. 후에 프랑스 풋볼이 비유럽인까지 수상 범위를 확대해 재평가한 발롱도르 재투표에서 1963년의 발롱도르를 그대로 레프 야신이 아닌 최전성기를 달리던 펠레에게 준 것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5. 그럼 왜 야신이 역대 최고의 골키퍼인가
*야신이 뛰던 소련 리그의 수준은 꽤 높았다
지금의 러시아 리그를 생각하면 안됩니다. 당시에는 유럽 리그의 헤게모니가 지금의 4대 리그, 5대 리그로 불리는 각국으로 몰리기 이전 시점이었습니다. 야신이 최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의 유럽 엘로 랭킹입니다. 그가 뛰던 리그의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는 소련 리그 최고의 팀으로 여겨졌는데 사진에서 보여지듯이 7위에 위치되어있으며 이는 에우제비우의 벤피카와 최전성기를 달리던 토트넘보다 높은 순위입니다. 또한 야신이 있었던 디나모 모스크바의 순위는 24위, 그 위에도 2개의 소련 클럽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실제로 야신이 데뷔하고 전성기에 돌입한 1950년대 중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는 소련 대표팀, = 소련 리그의 전성기와 맞물리며 유럽에서도 나름 알아주는 수준의 리그로 평가받았습니다. 물론 감안해야 할 부분은 당시 소련 리그가 유러피언컵같은 최정상급 유럽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이지만 이당시에는 지금보다 국제 대회의 위상이 훨씬 높았고 앞서 말했듯 소련의 탑클래스 선수들은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했기에 유럽 대항전 활약이 없다는 비판은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도 안되는 개인 기록들
프로 통산 812경기 470클린시트, 국가대표팀 경기 78경기 70실점 24클린시트, 약 1000회의 1대1 찬스에서 약 50회의 선방, 통산 150회가 넘는 페널티 선방, 50퍼대의 페널티킥 선방률 등 발표하는 언론마다 약간의 수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이 언저리의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역대급 골키퍼들 중에서도 이정도의 방어율, 선방률을 자랑하는 골키퍼는 없다고봐도 무방합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소련 리그 수준을 생각하면 프로 통산의 클린시트 비율도 엄청난 업적이며 국가대표팀에서도 경기당 0.89골의 실점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시야스의 대표팀 경기당 실점률이 0.55골, 부폰이 0.81골의 실점률 등 더 훌륭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키퍼도 있지만 당시 축구는 월드컵 경기당 평균 득점만봐도 알 수 있듯이 지금보다 2배 가량 골이 더 터지는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습니다. 또한 50퍼대의 페널티 선방률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않게 당시에도 키커들의 페널티킥 성공률이 80퍼센트에 육박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정말 어마무시한 수치입니다.
*압도적인 발롱도르 투표율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1956년 첫 시작된 이후 선수 개인의 평가에 있어서 발롱도르는 굉장히 중요한 지표로 작용해왔습니다. 이 발롱도르의 순위 선정 방식은 프랑스 풋볼의 각 기자, 전문가들이 5개의 투표권을 가지며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선수를 1위부터 5위까지 선정(1위는 6점, 2위는 4점)하고 그 다섯명의 선수에게만 점수가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굳이 발롱도르가 아니더라도 이런 올해의 선수상 부류의 개인 투표에서는 골키퍼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다른 필드 플레이어들에 비해 불리할 수 밖에 없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신은 무려 10번의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효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연도별로 가장 발롱도르 순위가 높은 골키퍼로 책정해봐도 야신은 아홉번의 해동안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누렸습니다. 올리버 칸, 고든 뱅크스, 페테르 슈마이켈 등의 역대급 골키퍼들도 발롱 순위가 가장 높았던 골키퍼로 꼽힌 기간은 2년간 뿐이며 디노 조프와 마누엘 노이어가 3번, 리나트 다사예프가 4번, 정말 오랫동안 최정상 자리를 지켰던 잔루이지 부폰과 뛰어난 임팩트를 남긴 이케르 카시야스마저도 5번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레프 야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압도적으로 세계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지켰는지 체감이되는 대기록입니다.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어간 골키퍼는 많아도 이렇게 오랜 기간 유효표를 꾸준히 받은 것은 정말 유례없는 기록입니다.
마치며
간혹가다 과거 선수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너무 터무니 없이 부풀려진 유언비어를 이야기한다던지 아니면 반대로 아예 극단적으로 과거 축구를 동네 축구 수준의 경기로 폄하한다던지하는 댓글이 상당히 많이 돌아다닙니다. 축구 역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가슴이 아프지만 허허 이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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